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리비아 내전 (문단 편집) === 나푸사 산맥 전투 === 6월 4일부터 [[영국군]]과 [[프랑스군]]이 [[공격헬기]]를 동원한 공습을 시작하였다. 때를 같이하여 리비아 서부 나푸사 산맥[* 트리포리 광역권과 사하라 사막 사이에 동서로 뻗어 있는 산지. 중세 시기 [[카와리지]] 세력의 근거지였다] 지역에 은거한 시민군이 정부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였다.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3~5월에 걸친 정부군의 공격으로 인해 많은 힘을 잃었으나 6월 들어 반격을 개시하였고 [[프랑스]]와 [[영국]]은 나푸사 산맥에 소화기와 전투복, 통신 장비 등을 공수해 이들을 지원하였다.[*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소화기와 탄약만 공급했다고 밝혔으나《르 피가로》지는 로켓 발사기와 대전차 미사일도 지원했다고 보도하였다.] 6월 7일에 이르러 시민군은 주요 거점인 야프란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. 정부군은 8일 반격을 위해 또다시 미스라타를(...) 공격하였다. 이 공격은 한달 내내 계속되었다.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26일 트리폴리와 80Km 떨어진 비르 알 가남을 향해 공세를 개시하였다. 그러나 정부군의 로켓 포격으로 인해 시민군의 공세는 7월 1일 좌절되었고 시민군은 방향을 바꿔 7월 6일 알 콰왈리쉬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다. 나토군의 공습을 신호로 시민군은 공격을 개시해 몇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알 콰왈리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. 그러나 정부군이 무차별 로켓 포격을 가하며 반격에 나서면서 시민군은 더이상의 공세에 나서지 못하였다. 이어 7월 한 달 동안 알 콰왈리쉬를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. 알 콰왈리쉬의 시민군은 13일 탄약이 떨어져 일시 후퇴하였지만 곧장 동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그 날 저녁부터 알 콰왈리쉬 서쪽을 장악한 정부군과 5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정부군을 몰아냈다. 24일 다시 정부군이 알 콰왈리쉬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시민군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